김문정은 왜 이 회사를 10년째 다닐까


이진민 지음 | 판형 135×195 |면수 272면
분야 경제경영(마케팅/세일즈) | 발행일 2019년 11월 5일
ISBN 979-11-86578-78-0 13320 | 값 12,000원


■ 이 책은…

‘선영아 사랑해!’ 2000년 어느 날,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 사랑 고백은 저자 이진민이 14년 동안의 카피라이터 생활을 뒤로하고 시작부터 진두지휘했던 한 여성포털 사이트의 출범을 알리는 광고였다. 그렇게 깜짝 고백으로 선영이들을 만난 지 거의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아직도 이 사랑고백은 진행 중이다. ‘선영아, 함께해!’ 라면서.
“나는 뼛속까지 여자이고,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싶고, 여자로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일도 사랑도 여성으로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저자는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여드름 고민 때문에 세계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찾아낸 ‘천연화장품’을 세상의 모든 여성들, 바로 선영이와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이소이’라는 천연화장품 회사를 만들었다.
10년 전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아이소이’는 현재 천연화장품 업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더마테스트’라고 불리는 독일의 알러지 테스트에서 전 제품 최우수를 획득했고, 국내 화장품 회사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EWG Verified’ 마크를 획득했으며, 미국의 유기농 마켓인 홀푸드에 전 제품 라인이 입점했다. 아이소이는 소중한 가치, 사람에 대한 생각, 경영과 나눔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으로 착한 사람들과 착한 화장품, 착한 경영을 지속적으로 펼쳐오는 정직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마케터로 시작해서 아이소이 화장품의 CEO가 된 이진민의 마케팅 이야기이면서 직원들이 말하는 직장문화 엿보기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 직원들이 즐겁게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하며,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도록 궁리하고 실천하고 있는 천연화장품 회사 아이소이의 10년에 대한 경영보고서이기도 하다.


■ 출판사 서평

마케터로 시작해 ‘선영아 사랑해!’ 마이클럽을 만들고
아이소이 화장품 CEO가 된 이진민의 마케팅 이야기

이진민, 그녀는 한 마디로 잘나가는 마케터였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제일기획 최연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한국 지형에 강하다, 애니콜’ ‘나는 나 톰보이’ 등 다수 카피로 유명세를 떨쳤다. 승승장구하던 그녀가 14년 동안의 카피라이터 생활을 뒤로하고 ‘선영아 사랑해’라는 카피로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여성포털 사이트 ‘마이클럽’을 진두지휘하고 나섰다.
“나는 뼛속까지 여자이고,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싶고, 여자로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일도 사랑도 여성으로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오직 여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온전히 담아서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마이클럽의 본질이 바뀌고 초기 멤버들이 밀려나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여성을 위한’이라는 자신의 인생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여드름 고민 때문에 세계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찾아낸 ‘천연화장품’을 세상의 모든 여성들, 바로 선영이와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이소이’라는 천연화장품 회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10년 전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아이소이’는 현재 천연화장품 업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더마테스트’라고 불리는 독일의 알러지 테스트에서 전 제품 최우수를 획득했고, 국내 화장품 회사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EWG Verified’ 마크를 획득했으며, 미국의 유기농 마켓인 홀푸드에는 뉴욕점을 시작으로 2019년 현재 약 120개까지 늘어났다. 아이소이는 소중한 가치, 사람에 대한 생각, 경영과 나눔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으로 착한 사람들과 착한 화장품, 착한 경영을 지속적으로 펼쳐오는 정직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마케터로 시작해서 아이소이 화장품의 CEO가 된 이진민의 마케팅 이야기이면서 천연화장품 사업 10년에 대한 보고서이다.


믿음과 신뢰 담아 아이소이(isoi:‘나는 정말 똑똑해’)라 부르고
선영이를 위한 약속으로 4가지 아이소이즘 만들어

‘isoi’에는 ‘I am So Intelligent’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나는 정말 똑똑해!’ 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평소 저자가 선영이에 대해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해왔던 ‘우리나라 여자들이 얼마나 똑똑한데!’라는 믿음이 듬뿍 담긴 말이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중심을 지키며 세상을 이끌고, 옳고 그른 것과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할 줄 안다. 때로는 따라쟁이의 지갑을 노리는 술수에 말려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배울 줄 알고, 또 배운 것을 나눌 줄도 안다.”
이것이 저자가 알고 있는 수많은 선영이들의 모습이다. 천연 화장품 불모지에 독일 천연 화장품 브랜드인 로고나를 처음 한국에 들여올 때부터 선영이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피부에 부작용이 없는 좋은 제품임을 금방 알아봐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선영이와 오랜 시간 교감하기 위한 약속이면서 시간이 흘러도 초심을 지킬 수 있도록 아이소이만의 원칙, 아이소이의 철학을 세웠다. 이것을 아이소이즘(isoism)이라고 부른다.
그 첫째가 바로 몸에 좋지 않은 나쁜 성분은 절대 넣지 않겠다는 무첨가 원칙이고, 최고의 품질을 가진 원료를 사용한다는 원료 최고주의가 두 번째 원칙이다. 세 번째는 100% 자연 성분 중에서도 피부에 가장 자극이 적은 원료를 찾아 사용하겠다는 피부 저자극주의이고, 피부 자체의 자생력을 키우고 최고의 개선 효과를 낼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효과 제일주의가 네 번째 원칙이다.
이 책에서는 아이소이가 어떻게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국내 최고의 천연화장품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근간이 되는 회사의 경영철학을 알려주고 있다.


김문정은 왜 이 회사를 10년째 다닐까?
직원들이 말하는 아이소이의 직장문화 엿보기

아이소이는 창업 10년을 맞고 있다. 아이소이의 팀장급 인원은 대략 10명 정도. 회사가 10년 이상 되면 처음 입사한 인력이 100% 그대로 계속 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소이는 적어도 팀장급 들 중에서는 그만 둔 사람이 아직 없다. 적어도 7년, 많게는 10년 이상 줄곧 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김문정은 실제 7년 남짓 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도 저자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회사, 만들고 싶었던 제품, 지키고 싶었던 철학을 비교적 잘 지켜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줄 거라는 직원들의 의견에 공감해 결국 이렇게 정했다.
확실히 아이소이의 직원들은 다른 회사에 비하면 오래 다니는 경우가 정말 많은 편이다. 중소기업인 아이소이가 직원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줄 형편이 못 되는 게 당연하겠지만 적어도 그들 개개인을 만족시켜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직원은 보수가 적당해서, 혹은 업무와 연계하여 여행을 다닐 수 있어서, 업무에 나름 보람을 느껴서 등등 각자가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이 책에서는 직원들이 직접 말하는 아이소이에 다니는 이유와 아이소이만의 차별화된 직장문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 책 속으로

고객의 피부를 건강하게 지키는 똑똑한 화장품, 화학성분 범벅인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중요한 화장품, 천연의 순수함을 그대로 살려낸 순수한 화장품이 바로 아이소이인 것이다.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선영이들은 아이소이라는 브랜드의 의미와 정체성이 그 이름을 달고 출시되는 모든 제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을 알아봐주었고, 고객의 피부를 지키는 ‘착한 화장품’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마니아들이 생겼고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사용 후기들이 올라왔다.
-40쪽 <선영아, 넌 참 똑똑해> 중에서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게 우리 아이소이인의 마음이다. 설령 그 사람이 나와는 다른, 혹은 기대와 다른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랑한다’는 마음을 담고 싶었다.
나는 이 ‘선영아 사랑해!’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 가지는 힘이 조금씩 더 확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이 “우리가 얼마나 정성들여 제품을 만드는지를 웹 드라마로 한번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럼 제목은 ‘선영아, 사랑해!’로 하자고 한 것도 그 바람 때문이었다.
-54~55쪽 <웹드라마 ‘선영아 사랑해’> 중에서

화장품을 사용하는 여성을 사랑과 존중의 대상으로 보기는커녕 쉽게 현혹할 수 있는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화장품 마케팅’이 행해지고 있었다. 소비자를 바보 혹은 봉으로만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매커니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나는 화장품 사업 초창기부터 아예 비싼 돈 드는 마케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좋은 원료로 착한 화장품을 만드는 데 더 정성을 쏟았다. 작은 회사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는 비결은 오직 진실함에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11쪽 <착한 성분만 강조하는 화장품 거꾸로 마케팅> 중에서

채용 당시까지도 아토피가 개선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이 직접 써봐서 설명을 더 잘할 수 있다면서 강력하게 직원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패기와 제품에 대한 애정에 감동해 매니저로 채용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며 아이소이 매장의 보배가 되었다. 지금도 간혹 ‘그래도 화장품 회사인데 피부가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부는 우리 제품으로 좋아질 수 있으니 아이소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134~135쪽 <피부 나쁘면 직원으로 딱이죠> 중에서

“그러고 보니까 작년 12월 아시죠? 그땐 한겨울에 하노이 갔잖아요. 그것도 한 열흘 가까이 간 거 같은데. 날씨는 더워 죽겠지, 실내에 들어서면 에어컨 때문에 추워죽겠지. 그거 막상 당하면 절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장님, 이제 제발 좀…”
“뭐 어쩌라고? 원하는 게 뭐야?”
“그러니까 이제 제발 좀… 뉴욕 보내주세요.”
“에휴… 인간아, 일 좀 해 일 좀!”
그렇다. 난 그놈의 여행 때문에 이 회사를 못 그만둔다.
-219쪽 <내가 이 회사를 때려치우지 못하는 이유> 중에서


■ 추천사

피부 트러블로 고생해 본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고 지치게 하는지 안다. 아이소이를 구매하는 모든 고객들은 이 험한 길에서 고생고생하다 만난 사람들이 많다. 우선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피부가 건강하고 좋아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열심히 아이소이에 대해 떠들게 된다. 신념과 가치관이 분명한 브랜드 아이소이는 천연제품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변함없이 원칙을 지키며 성장하고 있음이 고맙다.
-권보라 (대학교 교직원・아이소이 10년 고객)

아이소이와 함께한 10년 동안 내 피부는 놀랄 정도로 변했다. 물론 피부가 화장품만으로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좋은 성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이윤을 쫓기보다 의미를 찾고 사람을 바라보며 성장해온 아이소이의 10년이 담겨있다. 아이소이를 만나고 처음부터 함께해온 나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화장품을 들고 읽기조차 어려운 화학성분을 찾아내느라 애쓸 필요 없다. 그냥 아이소이를 선택하면 안심이 된다.
-양윤정(약사・아이소이 10년 고객)

아이소이를 알게 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이소이가 벤처였을 때부터 시작하여 천연화장품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 지금까지 함께했다. 이 책엔 아이소이의 소중한 가치. 사람에 대한 생각, 경영과 나눔에 대해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보물이 들어있다. 착한 사람들과 착한 화장품, 착한 경영을 지속적으로 펼쳐오는 정직한 기업이 아이소이다. 나는 열혈 소비자로, 전속모델로, 지금은 여전히 최우수 소비자로 살고 있다.
-김혜은(영화배우)

아이소이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러시아에 고려인 교육문화센터와 베트남에 교육기관을 지속해서 세워왔을 뿐 아니라 오래 전부터 국내외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나눔을 실천해왔다. 우리가 느낀 감동처럼
-유원식(기아대책 회장)


■ 지은이

이진민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제일기획 최연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한국 지형에 강하다, 애니콜’ ‘나는 나 톰보이’ 등 다수 카피로 유명세를 떨쳤다. 어느 날 여성포털 마이클럽 창립멤버로서 ‘선영아 사랑해’를 히트시키며 또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고질적인 피부 트러블 때문에 고민하다 천연화장품에 손을 대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유기농 화장품 브랜드인 로고나코리아를 판매하였고 10년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유기농 천연화장품의 노하우를 축적해서 2009년 ‘아이소이’를 만들어 국내 최초 천연화장품 시대를 열었다. 무늬만 천연이 아닌 실제 천연, 유기농 화장품으로 생산 제품 대부분을 까다로운 국제 환경 인증을 받아 미국 최고의 유기농마켓인 홀푸드에 진출, 히트를 시키며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도 활동했고 착한 화장품, 착한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 목차


프롤로그

1장 선영아, 사랑해!

01 선영아, 여전히 널 사랑해
02 잘나가던 카피라이터를 버리고
03 지구 끝이라도 간다
04 선영아, 넌 참 똑똑해
05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어?
06 우리나라 최초의 착한 성분, 착한 화장품
07 웹드라마 ‘선영아 사랑해’
08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i♡i

2장 선영아, 안심해!

01 손 떨리게 비싼 불가리안 로즈 오또
02 까다로워서 이어진 바일란트와의 인연
03 그래, 그럼 우린 못 만들어
04 제발 저희 선베이스는 사지 마세요
05 EWG 회장으로부터 온 메시지
06 홀푸드 마켓에서 품절이라고?
07 착한 성분만 강조하는 화장품 거꾸로 마케팅
08 화장품 좀 아는 여자는 시크릿북을 읽는다
09 가로수 길 콘셉트 스토어
10 피부 나쁘면 직원으로 딱이죠
11 의심의 눈초리에서 인정의 눈빛으로

3장 선영아, 행복해!

01 나쁜 돈과 착한 돈
02 하고 싶어? 그럼 해보자!
03 회사에 행사가 너무 많다고?
04 연월차 쓰는 걸 왜 물어봐?
05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놀까
06 아카데미가 심심하다고?
07 집밥 먹고 필라테스로 허리 펴야지
08 출장을 빙자한 해외여행
09 나눔의 가치, 같이의 가치

4장 선영아, 함께해! 직원들이 말하는 아이소이

01 나는 왜 이 회사를 7년째 다닐까?⋮김○정 (신상품개발팀)
02 90년생이 왔다!⋮최○숙 (오프라인 마케팅팀)
03 10년 넘게 갈색병만 쓰던 나⋮최○선 (오프라인 디자인팀)
04 나는 아이소이 대표 ‘골골이’⋮박○선 (온라인 마케팅팀)
05 내가 이 회사를 때려치우지 못하는 이유⋮이○욱 (오프라인 마케팅)
06 쉿! 우린 반품이 반가워요⋮신○은 (온라인 마케팅팀)
07 사장님보다 화장품이 더 좋아요!⋮한○진 (온라인 영업팀)
08 쉬는 것도 용기와 응원이 필요하다⋮김○은 (온라인 마케팅팀)
09 업무시간에 떠나는 유럽여행⋮김○우 (직영관리팀)
10 워킹맘이 더 대우받는 곳⋮유○연 (온라인 마케팅팀)
11 자랑이 적성입니다⋮전○덕 (홍보팀)
12 어떻게 해서 아이소이를 쓰게 되었냐면요⋮오○열 (오프라인 영업팀)
13 비밀의 방 회의가 무서워⋮김○태 (관리팀)
14 인생지사 새옹지마⋮주○영 (수출/면세팀)
15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다⋮진○섭 (온라인 마케팅팀)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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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

홍미숙 지음 | 판형 152×215 |면수 280,

분야 역사, 한국사 | 발행일 2019111

ISBN 979-11-86578-79-7 03910 | 16,000

 

이 책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

영국의 경제사가 토니(Richard Henry Tawney)역사가들은 승리한 세력은 눈에 띄는 곳으로 끌어내고, 그들이 집어삼킨 세력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에 불가피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 H. (Edward Hallett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역사를 이끈 주역임을 강조한다. 패자들의 역사는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다. 사람들은 승자의 운명보다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을 산 인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기 때문에 비운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비운의 왕, 비운의 왕비, 비운의 왕자, 비운의 공주, 비운의 후궁 등의 이야기가 문화콘텐츠가 되어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 등으로 재구성되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내재된 비극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 요절한 왕세자가 6,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 ‘태조의 4대조 왕릉 4’,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책 속으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

영국의 경제사가 토니(Richard Henry Tawney)역사가들은 승리한 세력은 눈에 띄는 곳으로 끌어내고, 그들이 집어삼킨 세력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에 불가피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 H. (Edward Hallett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역사를 이끈 주역임을 강조한다. 패자들의 역사는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다. 사람들은 승자의 운명보다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을 산 인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기 때문에 비운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비운의 왕, 비운의 왕비, 비운의 왕자, 비운의 공주, 비운의 후궁 등의 이야기가 문화콘텐츠가 되어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 등으로 재구성되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내재된 비극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 요절한 왕세자가 6,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 ‘태조의 4대조 왕릉 4’,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폐세자

조선왕조는 1392717일 개국해 1910829일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가량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는 동안 4명의 왕세자가 폐위되어 살해를 당하거나 억울한 삶을 살았다. 조선의 왕세자들 중 원래 폐세자가 된 왕세자는 4명이 아니라 5명이다. 사도세자가 복위되어 폐세자의 딱지를 떼게 되어 4명이다. 복위되지 못한 4명의 폐세자들 중 태조의 막내아들 의안대군과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그들의 아버지가 왕위를 잘 지켰기 때문에 죽어서나마 대접을 받고 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 중에서도 폐세자들 만큼 억울한 경우도 없다. 별 탈 없으면 왕이 되었을 서열 1위에서 한순간 추락하게 되는 이들의 삶이 가장 처절할 것이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요절한 왕세자들

조선왕조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왕세자가 6명이나 된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이장, 명종의 아들 순효세자 이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이왕,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 이행,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이항,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이영 등 6명이 보장받은 그들의 삶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까지 받았는데 뭐 그리 급해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났을까? 이들은 애석하게도 하늘이 내린 명이 짧아 이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소현세자와 같은 경우에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죽어간 왕세자도 있다. 요절한 6명의 왕세자들을 만나본다.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폐세자 중 사도세자만이 죽은 뒤 유일하게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들어가기 전 서인으로 폐위되었다가 죽은 뒤 뒤주 밖으로 나와 왕세자로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죽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18999월 고손인 제26대 왕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소주방에서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사도세자는 이 안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땡볕에서 8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똥오줌 범벅이 되어 죽어갔다.”

이 현장을 생각하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사도세자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세자도 드물다. 오죽했으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그의 삶을 조명했을까 싶다.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의민황태자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으로 189710월 고종에 의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선포된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우리는 그를 의민황태자 아니 영친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합방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대한제국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가 되고 말았다. 조선의 유일한 황태자를 만나본다.

 

단명한 왕세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 의민황태자의 아들이면서 고종의 손자인 황세손 이진은 비운의 왕세손들이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장손으로 태어난 지 3세에 세상을 떠났고, 황세손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유일한 황세손이지만 출생한 지 8개월 남짓도 안 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의소세손 이정과 나라를 잃은 슬픔에 더하여 독살설까지 제기된 단명한 왕세손 이진을 만나본다.

조선에서 왕자로 태어난 그들은 과연 몇 명이나 행복을 느끼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을까?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이 된 왕자들 역시 행복했을까?

조선왕조 27명의 왕들 중 14명만 왕을 낳았고, 13명은 왕을 낳지 못했다. 왕을 낳은 14명 중에서 5명은 2명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 19명만 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나머지 8명은 추존왕과 대원군의 아들들이다. 그러니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지 않고, 왕이 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15

 

의안대군 방석은 부모의 뜻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무시무시한 이복형 방원에 의해 폐세자가 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어쩌면 부모의 과잉 사랑이 그의 목숨을 일찍 앗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 태조가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에게 푹 빠져 원비 소생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이 같은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31

 

양녕대군의 실덕失德이 계속되자 바로 아래 동생 효령대군은 장차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 들어앉아 모든 걸 삼가고 글 읽기에 몰두했다. 양녕대군이 마침 효령대군의 방을 지나다 이를 보고 어리석다. 너는 충녕대군에게 성덕聖德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효령대군은 크게 깨달은 뒤 그 길로 자주 가던 절에 달려가 온종일 북을 두드렸다고 한다.43

 

폐왕 연산군의 아들 이황과 광해군의 아들 이지만 그야말로 찬밥 신세가 되어 죽어서도 대접을 못고 있다. 그들은 묘도 선물 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무덤을 조성해주지 않았다. 무덤조차 없으니 참으로 애달프다. 아버지가 폐왕이 되어 더는 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폐세자지만 광해군의 유일한 아들이니만큼 광해군 묘 부근으로 옮겨 묻어주지 그랬나 싶다.

폐세자가 된 그들의 아버지 연산군은 119개월, 광해군은 151개월이나 왕위에 올라있었는데도 겨우 초라한 묘를 선물 받았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황과 이지의 묘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들은 후손들의 관심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묘조차 남아있지 않은 폐세자 이지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게 만든 아버지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광해군의 소원대로 할머니 공빈 김씨(선조의 제1후궁)의 성묘와 가까이에 묻혔다.466~67

 

사람은 죄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니 의경세자도 아버지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 생각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갔으니 그래도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심씨에게는 같은 손자들인데 어찌 탈이 안 나겠는가. 의경세자도 연산군 아들 폐세자 이황과 광해군 아들 폐세자 이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잘못 둔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아버지 세조가 피를 나눈 삼촌들은 물론 집현전 학자들 대부분을 살해했음에도 폐왕이 되지 않은 덕분에 폐세자가 되지 않아 살해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 아닐까 싶다.85

 

인조는 8년 전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갈 때 통곡하며 지금의 일산까지 배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청나라 사신에게 아들이 추위를 많이 타니 온돌방에 재워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따뜻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아들을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관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104

 

안타깝게도 효장세자가 혼례를 치르던 날 설사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한 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때 효장세자가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곤룡포까지 벗어던지고 그를 끌어안은 채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왕세자만은 구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영조에게는 그때까지 적자가 한 명도 탄생하지 않았으며 후궁 소생으로도 효장세자가 유일한 아들이었다.129

 

그는 또 옷에 대한 광증 중 하나로 옷 갈아입기를 무서워하는 의대병衣帶病이라는 질병에도 시달렸다. 어렵게 장만한 옷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새 옷이어도 그냥 벗어 불태워버리고, 마음에 들면 그 옷이 다해지고 찌들어도 좀처럼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동궁전에 나오는 예산은 별로 없는데 수시로 옷을 만들어 바쳐야 했던 혜경궁 홍씨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 당시 그녀는 친정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중록등 여러 곳에 나와 있다. 그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해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했다.172

 

영친왕은 일본에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조선의 여인과 가례를 치렀을 것이다. 1907년 그가 일본에 끌려가기 전 약혼한 여인이 있었다. 영친왕의 약혼녀 이름은 민갑완(1897~1968)이다. 그녀는 명성황후 민씨의 친족이었던 승후관 민영돈의 딸로 11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그녀는 1501의 경쟁을 뚫고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약혼 선물까지 받은 비운의 왕세자빈이다. 1962년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에 대한 이야기가 백년한百年恨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이 귀중한 책은 민갑완 자신이 구술하고 조카딸이 썼다. 그녀는 간택이라는 허울 좋은 인간의 계약으로 말미암은 공방생활 50년의 역사는 가시밭길 바로 그것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책이 출판된 이듬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녀가 구술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면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기구한 삶을 역사와 함께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222

 

지은이

 

홍미숙

1959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1995년 수필 <어머니의 손>으로 문단에 데뷔하면서 적극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신문을 비롯한 여러 문학전문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동안 출판한 작품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영광도 차지했으며, 교보문고에서 화제의 신간으로 선정되어 몇 달 동안 특별 전시 판매되었고, ‘부모님을 위한 사랑 가득한 도서일상의 행복을 찾아서란 테마북으로도 선정·판매되었다. 무엇보다 전국수능모의고사와 외고입시 문제 등에 작품의 전문이 실리면서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2003년부터 국정교과서에 이어 검인정교과서(중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작품 신호등이 수록되었다.

KBS <주부 세상을 말하다>라는 생방송 프로에서 작가로서의 행복론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친바 있다. 요즘은 역사공부를 하면서 역사책을 쓰고 있으며, 일반 독자와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 및 도서관, 평생학습원, 국방대 등에서 역사 에세이와 수필 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수필집으로 그린벨트 안의 여자, 추억이 그리운 날에는 기차를 타고 싶다, 마중 나온 행복, 작은 꽃이 희망을 피운다, 희망이 행복에게, 나에게 주는 선물, 웃음꽃 피다등이 있으며 역사책으로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 사도,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조선이 버린 왕비들이 있다.

 

 

목차

 

서문 왕위 서열 1위가 물거품이 되어버리다니

 

 

1장 폐세자의 삶이란 억울하기 짝이 없나니

 

조선 최초로 살해된 왕세자 되다 / 의안대군 이방석(1대 왕 태조의 아들)

14년 동안의 왕세자 생활이 물거품 되다 / 양녕대군 이제(3대 왕 태종의 아들)

할머니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살해되다 / 폐세자 이황(10대 왕 연산군의 아들)

유배지에서 왕세자빈과 땅굴을 파다 죽음을 맞다 / 폐세자 이지(15대 왕 광해군의 아들)

 

 

2장 요절한 왕세자를 만나다

 

사촌동생인 단종과 같은 해에 세상 뜨다 / 의경세자 이장(도원군, 추존왕 덕종, 7대 왕 세조의 아들)

적통의 왕위 계승을 무너트리다 / 순회세자 이부(13대 왕 명종의 아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죽음을 앞당기다 / 소현세자 이왕(16대 왕 인조의 아들)

종묘 사직에 기여한 바 없는데 / 효장세자 이행(경의군, 추존왕 진종, 21대 왕 영조의 아들)

간절한 기다림 속에 태어나다 / 문효세자 이향(22대 왕 정조의 아들)

대리청정 중에 세상을 떠나다 / 효명세자 이영(추존왕 문조, 23대 왕 순조의 아들)

 

 

3장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사도思悼! 생각하면 슬프다 / 사도세자 이선(장헌세자, 추존왕 장조, 21대 왕 영조의 아들)

 

 

4장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일본인으로 살다 고국에 돌아와 숨을 거두다 / 의민황태자 이은(영친왕, 26대 왕 고종의 아들)

 

 

5장 단명한 왕세손

 

할아버지의 통곡 속에 잠들다 / 의소세손 이정(21대 왕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

생후 9개월 만에 의문사하다 / 황세손 이진(26대 왕 고종의 손자, 의민황태자의 아들)

 

 

글을 마치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

 

부록 1 조선왕계도

부록 2 조선의 왕릉 42

부록 3 조선의 원 14

부록 4 조선의 대원군 묘 3

부록 5 태조의 4대조 왕릉 4

부록 6 조선왕릉 상설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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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이 역사와 인물을 만든다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

 

이규원 지음 | 판형 153×224 |면수 480,

분야 인문, 풍수지리 | 발행일 2019822

ISBN 979-11-86578-76-6 03900 | 28,000

 

이 책은

 

땅은 어떻게 인걸을 잉태했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가?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산을 등 뒤로 하고 물을 마주 보는 강변이나 냇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따뜻하게 햇볕이 잘 드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살기에 가장 쾌적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배산임수의 안전지대를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고대 자생풍수의 시원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상이나 학풍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는 데는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배태(胚胎) 기간이 전제된다. 풍수지리 사상도 예외일 수 없다.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풍수 역사는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 국사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도선보다 210년 앞선 원효(元曉, 617~686) 대사 당시에도 풍수에 근거한 명당 택지(擇地)는 엄연히 존재했다. 한국의 풍수는 산 모형과 물줄기를 헤아려 자연 재해가 적은 곳을 택하는 생존의 지혜였다.

한반도 풍수의 기원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비롯된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동·서로 양분해 산줄기와 물길을 갈랐다. 이것이 고대 부족국가 영역이 되었고, 삼국의 국경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행정 체계를 구획 짓는 기준이 되었다. 또한 현대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고 있다. 이 땅의 인걸(人傑)들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기혈로 뭉친 1개 정간, 13개 정맥 아래서 태어나 한민족사를 주도하고 시대적 위기들을 극복해냈다. 명당과 관련한 인걸들의 면면은 대개 두뇌가 영민하고 무예가 출중했으며 개인적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명당이기에 한 시대의 국운을 좌우한 영웅호걸들을 태어나게 했는가? 땅은 어떻게 인물들을 잉태했고 역사를 이끌어 왔는가? 이처럼 땅이 암시해 주는 역사 속 인걸들의 이야기를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풍수학으로 엮어낸 인물 탐사기록이 바로 이규원의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이다.

 

역사를 주도한 인걸들과 명당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은 풍수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연관 속에 살아왔고 그러한 관심사는 오늘날의 생활 속에도 깊숙이 뿌리 내려져 있다. 한국의 풍수는 충과 효를 바탕으로 조상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사상이요, 학문이다. 내 자식, 내 권속만 출세하여 부자가 되려고 이용하던 비술이 아니다. 명당 혈처를 찾아 조상을 잘 모시고 바르게 살고자 했던 풍수사상은 충과 효 그리고 지조와 절개로 표상된 선비정신과 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지리는 단순히 명당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풍수와 인물 그리고 역사의 상호관계를 살피는 하나의 전통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는 역사를 주도한 인걸들과 명당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각 분야의 대가들을 우선했다. 또한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저명도도 함께 감안했다. 간략한 인물 평전을 겸한 이 책은 어려운 풍수 용어를 알기 쉽게 풀이해 읽는 재미를 보탰다. 1바람과 물, 풍수를 말하다에는 한국의 신화, 종교, 풍속에 대한 고찰을 통해 풍수의 기원과 천하제일의 명당을 소개한다. 2역사의 표상이 되다3신념대로 살다에는 회헌 안향, 방촌 황희, 사명대사 임응규, 다산 정약용, 포은 정몽주, 우암 송시열 등 역사의 본보기가 된 16명의 삶과 신념을 명당과 관련해 살펴본다. 4영욕의 삶을 살다에는 압구정 한명회, 강호산인 최만리 등 영예와 치욕이 함께 한 8명의 일대기를 조명한다. 5여인아, 시대를 살아내다에는 사임당 신인선, 거상 김만덕, 가수 이난영 등 남성 우월적인 유교사상이 사회 전반의 덕목이어서 여자 지위가 보잘 것 없던 때 독자적인 삶을 살아낸 7명의 여인들을 조명한다. 6현대사를 써 내려가다에는 안드레아 김대건, 면암 최익현, 만해 한용운, 작곡가 안익태 등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민족의 대의를 이끈 8명의 삶을 풍수학적으로 탐사한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산맥이란 말을 썼을까?

일제는 혹독한 고문과 죽음도 두려워 않는 한민족의 선비정신을 풍수사상에서도 찾아냈다. 그들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을 앞세워 우리 강토의 구석구석을 뒤져 조선의 풍수(란 책을 펴낸 후 풍수지리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이라며 조선 민중이 배우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더불어 조선 왕실의 맥을 끊기 위해 고종, 순종의 두 황제를 탄출(誕出)시킨 전설적 명당으로 꼽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의 묘(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뒤에 있는 거대한 입수 내룡맥을 무지막지하게 절단했다. 일제의 풍수 만행은 백두대간으로까지 확산됐다. 1903년 전국의 지하자원을 탐사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고유의 대간’, ‘정맥이란 용어를 없애고 그들이 쓰는 산맥이란 말로 바꿔놓았다. 산맥은 지질구조에 기반한 산과 들의 연결체계로 물길을 고려 않는 인위적 구획선이다. 1925년부터는 신속한 물자수송을 빌미로 백두대간 곳곳을 끊어 신작로를 냈다. 남한의 진부령에서 지리산 구간의 735중에서만 63곳이나 잘려 나갔다. 일제가 백두대간을 파괴하고 고유의 용어까지 말살한 이유는 땅의 운기와 인물의 탄생이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한국의 풍수사상이 충절(忠節)의 근본이자 독립운동을 이끈 선비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풍수사상이 독립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6현대사를 써 내려가다에 그대로 드러난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천주 신앙을 배교하지 않았던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을 일으켰지만 74세에 대마도로 유배당해 굶어 죽은 항일 의병대장 면암 최익현, 33인 민족대표로 불교개혁과 저술로 식민통치에 맞선 만해 한용운,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노심초사로 생애를 일관한 단재 신채호, 국어학자로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양성에 몸 바쳐 우리말글의 근대화와 중화를 이끈 한힌샘 주시경, 개인의 일신영달과 부의 대물림만이 가진 자의 능사가 아니라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며 위국헌신에 매진한 성제 이시영과 그의 형제들 등 우리의 근대사를 이끈 독립투사와 민족주의자들의 뚜렷한 행적에서 저자는 풍수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읽어낸다.

 

인걸의 탄생은 까닭이 있다!황희와 이항복

묏자리와 걸출한 인물의 탄생은 상당한 연관이 있다. 인걸의 탄생은 풍수라는 지리적 요건도 충분한 작용을 하지만 조상을 숭배하여 그들의 행적을 닮고자하는 후손들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진 필연의 결과이기도하다.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에 실린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그들의 가계를 보면 그러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황희 정승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여 조정 권신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는 인재를 기용할 때 출신 성분이나 가문보다는 인성과 실력을 우선시했고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황희 정승의 조부 묘는 기러기가 바람을 만나 울면서 멀리 날아간다.’는 명홍조풍형(鳴鴻遭風形)의 유명한 혈처다. 이 묘를 쓴 후 황씨 문중은 대대로 벼슬하며 크게 번성했다. 황희의 아들 황수신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선조 때 일본 통신사로 침략조짐을 보고한 황윤길, 영조 때 대제학 황경원,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음독 순결한 매천 황현도 그의 방손들이다. 묘 하나를 잘 써 이런 인물들이 배출됐다면 필경 까닭이 있는 법이다.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명을 설득시켜 왜군을 이 땅에서 패퇴시키고, 적통 왕자인 어린 영창대군(16061614)을 강화에 귀양 보내 죽이려는 광해군에게 추상같은 상소문을 올려 결국엔 귀향길에 올라 북청에서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백사 이항복은 생전에 자신의 묘를 직접 골랐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위치한 백사의 묘는 당대 신풍 박상의의 소점을 받아 백사가 직접 잡은 비룡상천혈(飛龍上天穴)로 죽엽산 중출맥의 영세발복 명당으로 꼽힌다. 백사의 묘를 북청에서 포천으로 이장을 한 이후 백사 문중에서는 육조판서와 삼정승이 연이어 출현했고 삼한갑족으로 우뚝 섰다. 경주 이씨는 조선조에만 8정승과 3명의 대제학이 가문을 빛냈고 1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시켰다. 영의정 이태좌, 이광좌, 이종성 등이 백사의 방손이며 한말 독립운동가 이회영, 초대 부통령 이시영도 그의 후예다.

 

과연 땅의 진실은 어디까지인가?정약용과 한명회

풍수와 인물의 관계가 꼭 가문의 번성과 인걸의 탄생이라는 좋은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조선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풍수를 멀리했다. 명당 논쟁에 국력이 소모되고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가산마저 탕진하는 당시 현실이 안타까워서였다.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된 다산의 묘는 자좌오향의 정남향으로 생가와 함께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 그의 묘는 춘천 쪽에서 흘러온 북한강과 충주에서 달려온 남한강이 합수돼 만나는 천혜의 절경이다. 사학자들은 당대 문한(文翰)으로 문명을 날리던 다산 3형제가 옥사로 죽거나 유배로 관운이 좌절됐다는 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전도가 유망했던 3형제가 한꺼번에 비운을 겪는 횡액을 당했기 때문이다.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풍수학계서는 생가 묘방(卯方), 즉 동쪽을 치고 들어오는 좌청룡의 능침살(陵侵殺)에서 그 연유를 찾고 있다. 실제 생가에 가보면 본채 처마와 날카롭게 맞서 있는 좌측 산세를 확인할 수 있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아들과 관직에 해당된다. 도도한 북한강은 활처럼 굽어진 궁현수(弓弦水)가 되지 못하고 직사로 빠져나가며 일직선의 수살水殺이 되고 있다. 실제로 다산 생가는 을축년(1925) 대홍수 때 모두 유실돼 다시 복원한 것이다. 과연 땅의 진실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조에 맞서 봉기한 사육신 세력을 잡아 가두고 참혹한 고문을 가해 그들의 목숨을 앗아버리고 가족까지 멸문시킨 한명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다. 사후 18년이 지난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한명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과 관련됐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참화를 당했다가 훗날 신원되었다. 그러나 한명회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공·과를 미리 예견해 사후를 대비했다. 무연고 묘지 유골을 광중위에 묻게 하여 정작 자신은 끔찍한 부관참시를 면하게 했다는 풍수학계의 정설이다.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천안(天安)에 묻힌 그의 속발지복혈(速發之福穴) 덕분에 후손들의 영화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또한 땅의 진실을 묻게 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삶과 풍수

학문과 교양을 갖춘 두루 갖춘 현부(賢婦) 신사임당의 예술 감각과 감수성은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신사임당은 친정 오죽헌에 살며 아들로 대를 잇지 못하는 외갓집을 늘 가슴 아파했다. 어느 해 가을, 남루한 행색의 탁발승이 대문 앞을 지나치며 외손 발복지로서야 손색없으련만 정작 내 대()는 누가 이을까?”라고 탄식했다. 사임당이 듣고 깜짝 놀랐으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외손 발복지는 아들보다 딸의 자손이 번성하는 집터나 묘터를 이르는데 오죽헌은 대표적인 외손 발복 양택지로 유명하다. 외손 발복지는 아들보다 딸의 자손이 번성하는 집터나 묘터를 이르는데 오죽헌은 대표적인 외손 발복 양택지로 유명하다.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 뒤의 오죽 밭에 올라 살펴보면 좌청룡은 넓고 펑퍼짐하게 지리멸렬해 있는데 우백호는 우렁차게 가옥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좌청룡은 아들과 관직을, 우백호는 딸과 재물을 관장한다. 이는 사임당과 율곡 모자의 생애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풍수 법도라 할 수 있다.

고죽 최경창은 절세미인의 관기 홍랑과의 사랑이 탄로나 관직에서 파직당한 뒤 중병을 앓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고죽의 무덤 앞에 손수 초막을 짓고 3년간 두문불출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심산유곡에서 혼자 시묘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홍랑은 천하일색의 얼굴을 심하게 훼손시켜 뭇 남자들의 접근을 막았고 커다란 숯덩이를 삼켜 불구가 되고 말았다. 후손들은 고죽의 무덤(부인 선산 임씨와 합장) 앞에 자좌오향(정남향)으로 홍랑을 묻었다. 우백호가 좌청룡의 설기(泄氣)를 막아 파수구를 관쇄(關鎖)한 고죽의 혈처다. 외척이나 여자의 슬기로 남자들이 출세하는 산형이다. 당쟁의 난국을 올곧은 소신으로 바로잡은 영조 때 영의정 최규서가 고죽의 현손(玄孫)이다.

천신만고 끝에 모은 거금을 세상 위해 기꺼이 환원시킨 당대의 여걸 김만덕은 제주성 안이 한눈에 조감되는 가으니마루길가에 묻혔다가 사후 165년 만인 1976년 제주시 사라봉에 모충사가 건립되고 의녀반수 김만덕 의인 묘탑이 조성되며 현 위치로 이장됐다. 제주 풍수학계서는 한라산 생기가 뭉친 명당 중 사라봉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인걸의 탄생이나 유적지가 많지 않은 이곳에서 만덕 할머니넋이 깃든 모충사는 제주를 빛낼 새 인물의 출현을 고대하는 염원의 현장이기도 하다. 후대 사람들에게 김만덕은 제주를 대표하는만덕 할머니로 칭송받게 되었다.

 

풍수, 우리 민족사와 동행해 온 인걸과 졸자의 자취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에는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의 낯익은 저명인사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우리 민족사와 동행해 온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들이다. 역사를 깊이 천착하다 보면 당대를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사례와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삶의 형태가 평가의 분기점에서 두드러지며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는 개인적 수양과 절제를 통해 자신을 지켜낸 인걸들의 생애다. 다음에는 분에 넘치는 부의 누림과 권력의 횡포를 일삼다가 스스로는 물론 후손들의 앞길까지 가로 막은 졸자들이다. 조상이 충신이고 간신이었다는 역사적 평판은 모조리 후손들의 몫으로 전가돼 가문의 창달과도 직결된다. 다시 말해 죄 없는 자손들이 연좌(緣坐)의 덫에 걸려 그 굴레를 못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신양명하여 출세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처신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 󰡔풍수로 읽는 인물열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교훈이다.

 

책 속으로

민족의 사표로 공직의 표상이 된 황희 정승 묘는 후손들이 묘역 관리를 잘해 엊그제 쓴 묘와 진배없었다. 반면 간신의 대명사가 된 임사홍 묘는 우거진 잡초 속에서 관직과 이름 석 자가 어렴풋이 새겨진 표석만 댕그라니 남았다. 충북 괴산과 충남 천안에 있는 우암 송시열과 암행어사 박문수 묘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 혈이다. 장군은 병사가 있어야 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혈 앞에 병사를 상징하는 물형이 없자 후손들이 거금을 갹출해 없던 시장을 개설했다. 오늘날의 괴산 청천장과 천안 병천(아우내) 장으로 장날마다 사람이 모여드니 곧 병사들이다. 허한 곳을 보충하는 한국만의 비보(裨補) 풍수로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현장이다. -7

우리나라 각 고장 지명은 역사와 지역 인심, 산천 운기와 상관된 작명이 많다. 그래서 역사는 인걸이 움직이고 지령地靈은 명인을 품는다 했다. 화산폭발이 잦아 기가 빠진 현무암 지반에서는 큰 인물이 배출될 수 없다. 풍수에서는 땅속의 지반을 인간의 태반과 동일시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생기가 충만한 화강암 지반이 대부분이어서 국가적 위기 때마다 영웅이 출현해 난세를 평정해 왔다. -91

하회마을은 일제 강점기 한일 간 풍수 격론이 벌어졌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전체 지형이 득수국得水局으로 거대한 배가 뜬 행주형임을 알았던 일본인들이 혈맥을 찾아 우물을 판 것이다. 낙동강 물을 길어다 먹던 주민들이 마을이 가라앉는다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일인들의 의도적 강압에 속수무책이었다. 최근까지도 이곳에선 우물 파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99

·서양을 뛰어넘어 명당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최근 추세를 감안할 때 풍수지리적으로 이들의 안식처는 어떤 곳일까. 625 한국전쟁 중 전사한 4만여 명의 유엔군 장병 이름을 모두 새긴 전몰장병 추모명비 앞에 서면 풍수에 앞서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이 철저히 적용됐음에 새삼 놀란다.

추모명비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원형수반(우주)의 물()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수반 내 움푹 팬 곳()에는 평화로운 삶으로 승화함을 뜻하는 꽃이 있고 전쟁과 죽음을 상징하는 철모()가 대칭으로 배치돼 있다. 22개국(한국 포함) 국기가 반기로 게양된 길 건너에는 목() () () () ()의 오행五行 색깔이 자유롭게 뒤섞여 상생하고 있는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137

고령 박씨 후손들은 부족한 병사들의 비보책으로 거액의 문중 돈을 갹출해 묘의 남쪽에 장터를 개설했다.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곳이며 병천 순댓국으로 유명한 아우내 장터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면적이 좁다는 이유로 장터를 옮기려 했으나 박씨 문중의 결사반대와 주민들 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번성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비보 풍수에 대한 믿음과 민족의식이 결합된 민중봉기의 발로였다.

박문수의 묘 너머 산기슭에는 고령 박씨 문중의 재실(문화재자료 제289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이 있다. 박 어사의 초상화(보물 제1189)가 보존돼 있으며 전국 각급 학교의 체험학습장과 수학여행지로도 각광 받고 있다. 한 시대를 바르게 산 뛰어난 인물이 문중을 빛내고 그 후손들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현장이다. -216~217

포은은 처음 궁궐 가까운 개성 산록에 묻혔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개성의 지기가 쇠하여 포은도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하게 되었다. 이장 행렬이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닥쳐 명정銘旌(붉은 천에 흰 글씨로 망자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질겁한 상주와 문하생들이 명정을 쫓아 떨어지는 곳에 이르니 오늘날 포은 묘가 있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의 문수산 안자락이었다. -234

강화에는 단군왕검이 국가안위를 기원하며 천제를 지낸 참성단과 조선 제25대 철종이 성장한 집터 등 명당 혈지가 많다. 이규보 묘는 서쪽(오른쪽)의 우백호가 길게 뻗어 안산(남주작)을 감싸 안은 백호 작국作局이다. 백운거사 묘 뒤의 입수入首 용맥에 올라보면 누구나 명당 혈지임을 직감하게 된다. 묘 아래에는 최근 문인들이 세운 백운문학비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규보가 본질상 입신출세 지향자였으며 철저한보신주의자였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30년이나 더 지속됐다. 묘역을 내려오며 먼 산에 뜬 저 구름에게 물었다.

이 시대 지식인 중 백운거사에게 돌 던질 자 과연 누구인가.” -297

만해는 몇몇 동지들에 의해 미아리 사설 장묘장에서 화장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좌묘향(정동향)으로 안치됐다. 고향으로 가려했으나 홍성이 의병의 고장임을 두려워해 총독부가 서둘러 이곳에 매장토록 했다. 이 당시만 해도 망우리 공동묘지는 전국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누구나 꺼리던 곳이었다.

현재는 망우리 묘지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일제강점기인 1933527일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1973328,500여 기의 분묘로 가득 차며 포화상태를 이뤘다. 이후 당국이 납골과 이장을 장려한 결과 현재는 1만여 기의 묘가 남아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활용되며 서울 시민과 인근 경기도 구리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 및 유명 인사들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조봉암, 오세창, 문일평, 장덕수, 방정환, 지석영과 문인으로는 박인환, 김말봉, 계용묵도 이곳에 영면하며 화가 이중섭, 작곡가 채동선, 요절한 가수 차중락도 잠들어 있다. -438~439

 

 

지은이

 

이규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홍성중, 예산농고를 거쳐 대학에서는 중국어와 장례풍수학을 전공했다. <종교신문> 취재부장, <세계종교신문> 주필, 월간 <광장> 편집장과 <세계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고교시절 유효동 선생과의 인연으로 풍수학에 입문한 뒤 화엄학의 태두 탄허 대종사로부터 주역과 명리를 인가받고 황진경 조실 스님에게서 사찰풍수를 전수받았다. 현역 취재 30여 년간 종교와 풍수전문 대기자로서 다양한 기사와 글을 집필해왔다.

1995<문예사조> 시 부문 신인상을 타며 문단에 등단한 후 제6회 부원문학상과 제27회 한국기자상 본상(출판저작 부문), 3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와 제111호 사직대제 전수교육을 이수했다. <온세종교> 신문을 창간해 발행인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사단법인 한국언론인연합회 사무총장 및 <조선일보> 789사진클럽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왕릉실록, 명당은 살아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 사람, 한국사찰순례(공저), 한국의 차세대(공저) 등이 있다.

 

 

목차

 

서문

1장 바람과 물, 풍수를 말하다

| 풍수와 백두대간 | 풍수의 기원 / 명당에 기를 공급하는 근본이 되니

| 풍수와 윤달 풍속 | 윤달의 의미 / 귀신의 해코지가 없는 달, 신들이 쉬나니

| 풍수와 영산정기 | 수경신 / 인간의 장수열망은 무한하여 생명연장을 꾀하나

| 제주 역사의 발상지 | 삼성혈과 탐라신화 / 탐라신화에서 성탄지로 성역화돼

| 천하제일 7명당 | 칠갑산과 장곡사 / 천하제일 7명당 중 그 한 자리가 바로 장곡사 터라

| 자유분방인 원효대사와 한국풍수 / 해골 물을 마시고 불도 깨달아 민중 불교로

| 신라의 파계승 | 부설거사와 월명암 / 파계승이나 도심은 깊어 불교사의 대업 이뤄

| 조선의 왕사 | 무학대사와 간월암 / 한양 천도하고 인재 출세시켜 나라 근본을 세우니

| 왕실과 풍수 | 태실과 태봉산 / 태 자 지명은 국풍 동원, 명당 혈지 많아

| 최고의 양택지 명당 | 안동 하회마을 / 곡물을 실은 배가 들어오는 행주형 명당이나

| 영험한 명당 발복지 | 광평대군 묘역 / 명당 발복은 후손들의 입신양명으로 입증하니

| 여인의 처신 | 서울 현충원과 창빈 묘 / 한 여인의 조신했던 처신으로 왕의 발복지가 되다

| 백령도의 풍수 기원 | 심청각과 인당수 / 백령도의 풍수 기원점은 심청각에서 비롯

| 한국 기독교의 성지 | 절두산과 외국인선교사 묘원 / 철길 경계로 가톨릭, 개신교 성지가 대조 이뤄

| 세계 평화의 상징 | 재한유엔기념공원 / 추모객 끊이지 않을 천혜 명당이라

| 자유수호의 현장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 나라 위해 헌신한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라

 

2장 역사의 표상이 되다

 

| 동방의 주자 | 회헌 안향 / 고려 최초 유학자로 중원 대륙의 성인 반열에 올라

| 청백리 표상 | 방촌 황희 / 정승이 나올 천하제일 명당이나 가난하게 사니

| 조선의 도연명 | 토정 이지함 /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니 신풍의 경지를 넘어

| 호국 승려 | 사명대사 임응규 / 절체절명의 국난을 당해 호국 일등공신이 되니

| 슬기로 국난극복 | 백사 이항복 / 우국충절 높이사 청백리에 녹선되니

| 난세를 이겨 낸 | 한음 이덕형 / 올곧은 신념 공직자의 본보기가 되어

| 공직자의 본보기 | 동고 이준경 / 붕당정치를 경계, 청렴한 인사 등용

| 정의로운 심판자 | 암행어사 박문수 / 부패한 관리 적발해 가차 없이 응징

| 실학의 대가 | 다산 정약용 / 유배지에서 위대한 민족 문화유산 남겨

 

3장 신념대로 살다

 

| 동방 이학을 정립 | 포은 정몽주 / 고려 왕조를 살리고자 안간힘, 선죽교에서 쓰러지니

| 외길 무관의 삶 | 설죽 이종무 / 대마도 정벌로 큰 공훈, 나라를 평안케 해

| 조선 개국공신 | 퇴촌 조영무 / 절제를 알아 무탈한 생애로 천수 누려

| 강직한 충신 | 경암 허조 / 청백리 기질, 부정부패에 가차 없는 원칙 확립

| 친명파 외교통 | 간이재 한확 / 조선과 명나라의 쟁점 현안 무리 없이 중재

| 생육신의 절의 | 추강 남효온 / 요주의 인물로 온갖 박해 술과 시로 울분 달래

| 예송논쟁의 거두 | 우암 송시열 / 사생결단 예송 논쟁으로 결국 사약 받아 절명

 

4장 영욕의 삶을 살다

 

| 고려의 대문장가 | 백운거사 이규보 / 올곧게 살고자 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 세조의 장자방 | 압구정 한명회 /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던가

| 뿌리깊은 사대주의자 | 강호산인 최만리 / 훈민정음 창제 반대, 언문으로 비하하니

| 승자편에 선 유학자 | 효중 정창손 / 승자 편에만 섰으나 일생은 파란만장 영욕이 교차하니

| 연산군의 난신 적자 | 이의 임사홍 / 모함과 분란, 간신 모리배의 말로는 비참했으니

| 관가를 습격한 3대 도적 | 백정 임꺽정 / 백정 출신, 신출귀몰 의적으로 불리나

| 이상주의자로 살다간 | 교산 허균 / 천재성 타고난 반골 재사로 이상 못 펼쳐

| 사도세자 장인 | 익익재 홍봉한 / 혈육지정인 사도세자 버리고 천수를 누렸건만

 

5장 여인아, 시대를 살아내다

 

| 현모양처의 표상 | 사임당 신인선 / 현명하고 어진 어미이자 천부적 예술인으로

| 조선 최고 러브스캔들 | 시인 최경창 기생 홍랑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문학사에 길이 남아

| 착한 기부로 난민 구휼 | 거상 김만덕 / 거상으로 번 돈, 통 큰 기부로 감동 주니

| 사제 간 못다한 사랑 | 동리 신재효 명창 진채선 / 제자에게 품은 연정이 사랑인 줄 알았으나

| 민족반역자 여간첩 | 사다코 배정자 / 수양딸로 삼았으나 이토의 속셈은 따로 있었으니

| 비극적 로맨스의 주인공 | 수선 윤심덕 / 운명적 만남이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 목포 삼절 삼학도 | 가수 이난영 / 별은 반짝이나 일생은 험난하기만 하고

 

6장 현대사를 써 내려가다

 

| 한국 최초의 신부 | 안드레아 김대건 / 그가 묻힌 곳은 한국 가톨릭의 성지가 되고

| 항일 의병대장 | 면암 최익현 / 구국 의병을 일으켰지만 74세에 대마도로 유배당하니

| 33인의 민족대표 | 만해 한용운 / 33인 민족대표로 3년 형, 식민통치에 맞서니

| 민족주의 사관 정립 | 단재 신채호 / 일제에 맞서 저항하는 길은 민족 정통사관 정립으로

| 한글 외길 사랑 | 한힌샘 주시경 / 세종의 한글창제 이후 최고 어문학자

| 메밀꽃 필 무렵 | 가산 이효석 / 한 편의 문학작품이 주는 감성의 힘, 지역경제 살려

| 위국헌신과 6형제 | 성재 이시영 / 거부의 대물림 포기, 전 재산 팔아 독립운동에

| 애국가와 한국환상곡 | 작곡가 안익태 / 한국인 정서에 맞게 작곡, 공식 애국가로 사용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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